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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여름 코엑스 수족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수족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지난번 퀘벡에 갔을 떄도 작은 수족관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이번 한국방문중에 꼭 가려고 마음먹은 곳이 코엑스 수족관이다. 첫째 녀석이 아주 어릴때 한번 갔었는데, 기억을 못한다. 지금 가장 잘나가는 수족관은 여수 박람회장에 있는 것이겠지만 너무 멀고 들어가는데만 3시간걸린다는 이야기에 포기했고, 가까운 코엑스 수족관에 갔다. 평일이었고 방학도 안해서 별로 안붐비리라 예상했지만, 유치원아이들이 견학을 와서 북적대긴 했다. 규모면에서는 당연히 퀘벡 수족관보다 컸지만, 퀘벡수족관에는 사람이 없어서(간날에 눈이 심하게 와서 더욱 없었다.) 관람하기는 훨씬 좋았다. 뭐 당연히 아이들이야 좋아했다.이런 것을 관람하는 것이 정서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어떤 ..
2012 서울, 함흥냉면, 오장동. 딸내미를 제외한 우리가족 모두가 냉면을 좋아한다. 하지만 냉면이라는 음식이 간단해 보여도 잘하는 집에가서 먹지 않으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그래서 이곳 캐나다에서는 대도시라고 하여도 그리 맛난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작년에 토론토를 갔을때는 칡냉면집에 갔었는데 그래도 먹을 만하기는 했지만, 정통 회냉면이 먹고 싶었기때문에 이번 방문에서 도착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자주 가던 함흥 냉면집이었다. 함흥냉면집에서 함께 주문한 만두. 그리고 회냉면. 하지만 시차때문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서 였는 지 아니면 너무 많은 기대를 했는지 맛이 그냥 그랬다. 귀국할때쯤 다시 맛보리라 마음 먹고 다음에는 유명하다는 오장동 냉면집을 찾았다.주말이어서 사람이 붐빌까봐 조금 일찍 찾았는데도 많은 사람이 냉면을 즐기고 있었다..
2012 여름, 서울 3년만에 '방문' 한 서울, 6개월전에 비행기표를 끊고 나서는 한동안 한국에 가는 꿈을 꾸었다. 친구들을 만나고, 즐겁게 쇼핑을 하고 맛난것을 찾아 다니며 먹는 3년전 한국을 떠나올때의 짜증나는 현실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뿌연 하늘 속의 더운 서울은 그리 나를 반기지 않았다. 여전히 차는 막히고, 숨쉬기는 답답하고, 친구들은 바빴으며, 음식은 기대 만큼 맛있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돈을 쓰는 일 뿐이고, 아이들 뒤치닥거리에 병원까지... 서울은 정말 바쁜 도시이다. 내가 가본 그 어느 도시보다 바쁘게 돌아간다.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난 이곳에 사는 것이 정말 불편한 일임을 안다. 뭐하나 시킬 수 없고, 천천히 돌아가는 세상. 그러기에 나역시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
캐논 변주곡 by Alan. 언젠가 내가 기타를 잘치게 된다면, 캐논변주곡을 연주했을 것이다. 내가 피아노를 잘친다면, 조지윈스턴의 캐논을 연주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아들에게 쳐보라고 강요하기 시작했지만, 아들의 손은 아직 이런 곡들을 치기에는 너무 작아서.. 그래서 좀 쉬운 아이들용버젼을 구해서 연습시켰다. 언젠가 더 어렵게 편곡된 노래도 강요해야지.
기타. 회사동료인 코리의 밴드 공연을 보고 나서 기타에 빠져 버렸다. 중학교때로 기억되는데, 아랫집 박모군의 영향으로 통기타를 산적이 있다. 하지만 곧 창고행이었다. 고등학교때 정모군의 영향으로 다시 기타에 빠져 들었던 적이 있다. 머 음악적인 재능이 전무한 관계로 기타는 전혀 진전이 없었지만, 그래도 정모군의 영향은 내게 꽤나 컸다. 그이후로 난 음악을 듣기시작했으니까. 그전에는 몇몇 히트가요나 듣는 정도 였는데, 그의 영향으로 레드 제플린을 핑크플로이드를 비틀즈를 알게 되었으니까. 이따금 기타를 쳐보려고 시도 해봤지만, 나에게 악기란, 혹은 나에게 음악이란 나의 청각에게만 호의 적이었지, 나의 다른 어떤 부위도 음악과 친하기 힘들었다. 다른 취미들은 인터넷으로 공부하고 해보면 최고는 아니더라도 흉내는 낼 수..
인생 유전. 어렸을 적 우리 아버지는 해외로 출장이 잦으셨다. 한번 오실때마다 장난감을 잔득 사주셨지만, 난 아빠랑 놀 수 없는 것이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함께 있으면 무섭지만 안계시면 그리운 존재. 난 그러지 않기를 여러번 다짐했다. 난 아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기위해 이곳에 왔고. 하지만 아들은 나와 보내는 시간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듯하다. 30년후에 우리 아들은, 자신의 블로그에 '어렸을 적 우리아버지는 나와 늘 함께 있었다. 지긋지긋한 기억이다. 그래서 난 그러지 않기를 여러번 다짐했다. 그런데 우리아들은 나와 함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라고 쓸 것 같아 두렵다. 아들로 인해 속상한 마음에 오랜만에 소주 한병을 먹고 올리는 포스트.
의미 없이 끝난 투잡 그리고 자유.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시간이 남아서 조금씩 하기로 한 앱작업을 하기로 한지 거의 일년이 다되어가지만, 결과는 커녕 진행도 잘안되었다. 초반에는 그래도 공부도 하고, 시간을 내서 맥북앞에도 좀 앉아있어보았는데, 부모님이 오시고 나서 잠시 접어두기로 했는데 접어둔시간이 조금씩 지나다 보니 다시 앉기가 싫어졌다. 그래도 회사직원이 디자이너가 되서 이것저것 도와주었는 데 몇달이 지나도 진전이 없자 오늘은 결국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왔다. 나는 할 수 없이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을 핑계로 당분간은 힘들겠다고 이야기했다. 뭐 잘 받아주는 듯하긴 했지만, 뭐 속마음이야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고... 그일을 시작하면서 난 나의 맥북을 지하에 가져다 두었다, 모니터도 하나 ..
나이아가라 연말에 사진정리하다가 잘나온 듯 하여....